Saturday, July 20, 2013

지옥은 신의 부재 낭독회를 끝내고


믿음에 대해 알게된 점이 있다. 절대적인 믿음이란, 맹목적인 사랑이란 인간에게 있어서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그것이 존재함을 믿어야만 한다. 그런 것이 존재할 것이라는 기대가 필요하다. 그리고, 인간은 스스로의 악을 밀어내기 위해 신을 믿어야만 한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 믿어야만 한다. 살기 위해 사랑받기 보다는, 구원 받기 위해 사랑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 신을 향해 품는 환상이다. 인간은 보통 스스로 구원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또 한가지 알게 된 것은 SF라는 장르문학의 특징이 연극과 매우 비슷하다는 점이다. 테드 창에 대해 조사하면서, 그가 한국에서의 인터뷰를 통해 SF에 대한 정의를 내린 것을 봤다. 테드 창은 SF란 과학적인 논리로 우주를 설명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 쓰여진 작품이라고 했다. 그리고 작가와 독자가 동시에 '다른 세계'를 머릿속에 그려보며 '사고를 실험하는' 장르라고도 했다. '지옥은 신의 부재'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천사의 강림과, 지옥의 존재를 증명하는 광경이 발 밑에 보이는 세계를 언어로 탄생시켰다. 그리고 강림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서 신을 증오하게 된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래서 나는 연극이 무대에서 구현하는 그 현실과는 '약간 다른' 차원이 SF장르의 논리와 닮아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소설이 희곡으로 재탄생 하면서 무대위에 현실화된 인물들은 다양한 선택에 대해 이야기 하며, 진정한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인다. 나는 그 '약간 다른' 회합장으로 관객을 초대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열띤 토론이 되지 못했다. 인물이 너무 적었고, 대사는 너무 설명적이었으며, 시점또한 너무 지난 상황이었다. 
어떤 답을 얻기 위한 과정이었다. 나는 내내 닐과 동화되어 있었다. 신이 부재하는 곳인 줄 알면서도 신을 향한 사랑에 영원히 고통스러워 하는. 대상없는 사랑에 대한 딜레마. '진정한 믿음이란 본디 이런 것이'라는 작가의 마지막 문장이 사무친다. 여기가 지옥이고, 사람들은 그 구원에 대해 대상 없음을 알면서도 맹목적인 믿음을 원하는구나.
나 또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거기다가 믿음을 시기하는 아이러니라니.


Monday, June 24, 2013

구원에 대하여


내게 있어서 구원이란 이 장면이다.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산딸기의 마지막 이미지. 이 기억은 영화의 주인공이 죽기 직전에 떠올리는 어떤 순간이다. 

그는 외과의사로 명망있는 생을 살았지만 가족들은 그를 냉혹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모두가 그렇겠지만 나는 몇 개의 단어들이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너무쉽게 말로 다른 사람을 묘사하고는 하지만 그것은 편의에 의한 것일 뿐이고 시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언어가 아닌 말일 뿐이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된다. 하지만 특정한 단어가 한 사람의 주변에서 오랫동안 맴돌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피로가 된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런 단어들이 켜켜이 쌓여 나와 세상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의 장벽이 견고해진다. 고단하다. 나이를 먹어가더라도, 주변 사람이 바뀌더라도 겉 모습만 다른, 하지만 속은 너무나 비슷한 모습으로 고집만 키워가는 것이.

그래서,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자 하는 욕망을 끊임없이 느낀다. 주변에 다른 사람을 두고 싶지 않은 것은 그로부터 비춰지는 내 모습을 보고싶지 않기 때문에. 그런 삶이 편안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혼자 있고싶다고 느낄 때마다 한편으로는 두려워진다. 왜 두려울까? 

사람들은 누구나 타자에게서 구원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찾다가도 끊임없이 실패한다. 주인공 이삭 보리 또한 그랬다. 그래서 그는 가족과 모든 관계를 단절한 냉혈한의 삶을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죽음 직전 과거의 관계를, 예전의 집을, 꿈 속을 거꾸로 추적해 들어갔다.

하지만 기억이 그를 데려다 놓은 곳은 그만의 맞춤형 미로였다. 그곳은 아름답지않다. 공포와 슬픔이 곳곳에 서려있는 악몽과도 같은 장소였다. 

그것은 밖에 있지 않았다. 결국에 그의 마지막 여행은 스스로에게서 어떤 구원을 찾아내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그것은 '순간'에 있었다. 생애 가장 순수한 기억속에, 가장 순수한 관계속에. 그리고 나도 나의 그 순간을 찾았다. 이 영화를 통해서였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고르고 그것을 곱씹어보는(고레에다 히로카즈, 원더풀 라이프..최근얘기지만.) 시간이 큰 위안이 되었다.

영화를 처음 본 뒤 벌써 오년이 흘렀다. 나는 스물여덟. 내 옆모습은 무척이나 피곤해보인다. 

Saturday, June 22, 2013

두근두근

검정치마의 노래를 들으며 정말 오래간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고보니 소설가 성석제가 책을 읽어주면서 드문드문 뜸을 들이며 아.. 음.. 이런 소리를 낼 때도 두근거렸다. 금각사를 멋들어지게 읽어줄 때 두근거리며 잠들었다. 생각해보니 성석제는 그냥 읽었고 금각사의 문장이 휘황 찬란했다. 활자로 읽을 때는 부담스러웠는데 담담하고 묵직한 목소리로 읊어주니 잘 어울리고 멋이 있다. 원더풀 라이프 라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를 보면서도 두근거렸다. 영화에 대한 영화가 믿음에 대한 것을 담는다는것이 신기하다. 나는 가끔 내가 기억을 맹신하는 것이 가소롭다. 홀리 모터스도 그랬는데. 한 ㅇㅇ에 대한 ㅇㅇ이기 때문일까? 그럼 이 세상에 대한 세상을 만들면 그게 신일까? The black keys 음악을 들으며 춤을 췄다. 그러고 나니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