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어서 구원이란 이 장면이다.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산딸기의 마지막 이미지. 이 기억은 영화의 주인공이 죽기 직전에 떠올리는 어떤 순간이다.
그는 외과의사로 명망있는 생을 살았지만 가족들은 그를 냉혹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모두가 그렇겠지만 나는 몇 개의 단어들이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너무쉽게 말로 다른 사람을 묘사하고는 하지만 그것은 편의에 의한 것일 뿐이고 시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언어가 아닌 말일 뿐이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된다. 하지만 특정한 단어가 한 사람의 주변에서 오랫동안 맴돌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피로가 된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런 단어들이 켜켜이 쌓여 나와 세상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의 장벽이 견고해진다. 고단하다. 나이를 먹어가더라도, 주변 사람이 바뀌더라도 겉 모습만 다른, 하지만 속은 너무나 비슷한 모습으로 고집만 키워가는 것이.
그래서,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자 하는 욕망을 끊임없이 느낀다. 주변에 다른 사람을 두고 싶지 않은 것은 그로부터 비춰지는 내 모습을 보고싶지 않기 때문에. 그런 삶이 편안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혼자 있고싶다고 느낄 때마다 한편으로는 두려워진다. 왜 두려울까?
사람들은 누구나 타자에게서 구원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찾다가도 끊임없이 실패한다. 주인공 이삭 보리 또한 그랬다. 그래서 그는 가족과 모든 관계를 단절한 냉혈한의 삶을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죽음 직전 과거의 관계를, 예전의 집을, 꿈 속을 거꾸로 추적해 들어갔다.
하지만 기억이 그를 데려다 놓은 곳은 그만의 맞춤형 미로였다. 그곳은 아름답지않다. 공포와 슬픔이 곳곳에 서려있는 악몽과도 같은 장소였다.
그것은 밖에 있지 않았다. 결국에 그의 마지막 여행은 스스로에게서 어떤 구원을 찾아내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그것은 '순간'에 있었다. 생애 가장 순수한 기억속에, 가장 순수한 관계속에. 그리고 나도 나의 그 순간을 찾았다. 이 영화를 통해서였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고르고 그것을 곱씹어보는(고레에다 히로카즈, 원더풀 라이프..최근얘기지만.) 시간이 큰 위안이 되었다.
영화를 처음 본 뒤 벌써 오년이 흘렀다. 나는 스물여덟. 내 옆모습은 무척이나 피곤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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